AI 회사가 책을 스캔한 뒤 버렸다…FTC 조사 요구가 나온 이유
미국의 소비자·공익단체 10여 곳이 인공지능(AI) 회사들의 책 대량 구매·스캔·폐기 관행을 조사해 달라고 미 연방거래위원회(FTC)에 요청했다. 단체들은 AI 회사가 종이책을 사서 디지털화한 뒤 실물 책을 없애는 방식이 저작권 문제를 넘어 경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회사와 일반 독자가 같은 책에 접근할 기회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8월 21일 제출된 서한에는 디맨드 프로그레스 교육기금, 미국소비자연맹, 지역자립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AI 개발사가 오래된 책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내용을 학습 데이터로 만든 뒤 원본을 폐기하는 이른바 ‘사재기 후 파기’ 관행의 규모를 FTC가 확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희귀본이나 마지막 남은 사본이 포함됐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사실과 주장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FTC가 AI 회사의 위법을 판정하거나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는 발표가 아니다. 시민단체가 조사를 요청한 단계다. 모든 AI 회사가 희귀본을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증거가 공개된 것도 아니다. 다만 앤트로픽이 수백만 권의 인쇄 책을 확보해 스캔하고 폐기했다는 내용이 저작권 소송 과정에서 알려졌고, 아마존도 AI 학습을 위해 책을 대량으로 사서 스캔한 뒤 파기한다는 별도 보도가 나오면서 문제가 경쟁 정책으로 번졌다.
일반 독자에게 이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책이 단순한 데이터 묶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AI 모델은 한 번 디지털 사본을 얻으면 계속 학습에 활용할 수 있지만, 종이 원본이 사라지면 도서관·연구자·작은 AI 회사·미래 독자는 같은 자료를 구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절판본과 지역 출판물처럼 다시 찍을 가능성이 낮은 책은 한 권의 폐기가 지식 접근성 자체를 줄일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CBS 뉴스 보도에 따르면 10여 개 공익·소비자 단체는 8월 21일 앤드루 퍼거슨 FTC 위원장과 마크 미더 위원에게 서한을 보냈다. 단체들은 AI 회사들이 책을 대량 구매하고, 내용을 디지털화해 대규모 언어모델 학습에 사용한 다음, 실물 사본을 폐기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런 관행이 FTC법 제5조가 금지하는 불공정한 경쟁 방법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본다. AI 모델을 만들려는 후발 회사는 양질의 책을 다시 확보해야 하지만, 선두 회사가 책을 사서 없앴다면 비용이 올라가고 자료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먼저 데이터를 확보한 회사만 디지털 사본을 독점적으로 보유하는 ‘해자’, 즉 경쟁사가 건너기 어려운 장벽이 생긴다는 논리다.
매셔블 보도는 서한이 특히 오래된 책의 가치를 강조한다고 전했다. 최근 책에는 AI가 생성한 문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2022년 이전 출판물은 생성형 AI가 대중화하기 전에 편집과 검수를 거친 인간의 글이라는 점에서 학습 데이터로 선호될 수 있다. 오래되고 잘 다듬어진 책이 AI 회사 사이의 경쟁 자원이 된 셈이다.
단체들은 FTC가 최소한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많은 책이 이런 방식으로 파기됐는지, 그중 해당 작품의 마지막 사본이 얼마나 포함됐는지다. 마지막 사본 여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같은 제목의 책이 도서관과 중고 시장에 수백 권 남아 있다면 한 권을 스캔 후 폐기한 영향은 제한적이다. 반면 지역 역사 자료나 소량 출판된 전문서는 한두 권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복구가 어려울 수 있다.
왜 책을 스캔한 뒤 돌려놓지 않았나
AI 학습에는 종이책 자체가 아니라 디지털 텍스트가 필요하다. 책장을 잘라 낱장으로 만들면 고속 스캐너가 빠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제본을 유지한 채 한 장씩 넘겨 촬영하는 것보다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들 수 있다. 대량 작업에서는 속도 차이가 매우 커진다.
이 방식의 문제는 책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데 있다. 등 부분을 잘라낸 책은 다시 판매하거나 도서관 서가에 꽂기 힘들다. 스캔 업체가 보관 비용과 재제본 비용을 피하려고 파쇄나 재활용을 선택할 수 있다. 대량 디지털화 업계에서 파괴형 스캔 자체가 새 기술은 아니지만, AI 회사가 수백만 권을 한꺼번에 확보하면서 규모와 목적이 달라졌다.
책을 합법적으로 샀다면 소유자가 그 한 권을 폐기할 수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개인이 산 책에 메모하거나 버리는 것까지 정부가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쟁법의 질문은 개별 책 한 권의 소유권에 그치지 않는다. 막대한 자본을 가진 회사가 시장에서 특정 자원을 대량으로 사들인 뒤 경쟁자가 다시 이용하지 못하게 없애는 전략이 시장 경쟁을 부당하게 제한하는지 살핀다.
예를 들어 식당이 당일 사용할 토마토를 사는 것과, 거대 업체가 지역의 모든 씨앗을 사서 자체 데이터만 남기고 폐기해 다른 농가의 재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경쟁 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다. 책도 복제가 가능한 정보라는 점에서 완전히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실물 원본의 희소성과 디지털 사본의 독점이 결합하면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저작권 소송과 이번 경쟁 문제는 다르다
이 논쟁에서 가장 혼동하기 쉬운 부분이 저작권과 독점 규제다. 저작권은 책의 문장과 표현을 누가 어떤 허락으로 복제하고 활용했는지를 묻는다. 경쟁법은 회사가 시장 지배력을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쟁사의 접근을 부당하게 막았는지를 묻는다. 같은 책 스캔 행위라도 두 법의 질문과 결론은 다를 수 있다.
CBS는 작가 안드레아 바츠 등이 앤트로픽을 상대로 낸 2024년 저작권 소송을 단체들이 근거로 들었다고 전했다. 소송에서 앤트로픽이 인쇄 책 수백만 권을 확보해 스캔하고 버렸다는 내용이 다뤄졌다. 2025년 법원은 합법적으로 구매한 책을 클로드 학습에 사용한 행위가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CBS의 설명이다.
그 판결이 “책을 파기해도 언제나 합법”이라는 선언은 아니다. 학습을 위한 저작물 이용이 저작권법상 허용되는지와, 실물 책을 대량 폐기해 경쟁자의 자료 접근을 막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또한 합법적으로 산 종이책과 불법 복제된 디지털 자료도 구분해야 한다. 하나의 판결을 모든 AI 학습 데이터 수집에 대한 면허처럼 해석하면 안 된다.
이번 서한이 FTC를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작권 소송에서 학습 행위가 허용되더라도, 데이터 확보 방식이 후발 경쟁자를 구조적으로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경쟁 당국에 제기한 것이다. FTC가 실제로 사건을 열면 책 시장의 구매 규모, 파기 지침, 희귀본 선별 여부, 디지털 사본을 누가 통제하는지 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조사 범위도 확정되지 않았다.
아마존 보도까지 더해진 이유
CBS는 디지털 매체 404 미디어가 아마존도 AI 도구 학습을 위해 책을 대량 구매하고 스캔한 뒤 폐기한다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아마존은 CBS의 논평 요청에 즉시 답하지 않았다. 앤트로픽도 보도 시점에 즉시 답변하지 않았다.
아마존이 언급되면서 논쟁은 한 AI 연구소의 데이터 수집 방식에서 더 넓은 시장 문제로 커졌다. 아마존은 온라인 서점, 전자책, 출판, 클라우드, AI 서비스를 함께 운영한다. 책의 유통 경로와 AI 학습 인프라 양쪽에 영향력이 있는 회사가 실물 책을 대량 확보한다면, 단순 구매자보다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수 있다.
그렇다고 아마존이 희귀본을 의도적으로 없앴다고 단정할 근거는 현재 공개 보도만으로 부족하다. 대량 스캔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책이 훼손된 것인지, 경쟁을 막기 위해 특정 책을 골라 파기한 것인지, 동일한 책이 시장에 얼마나 남았는지는 조사해야 알 수 있다. 공익단체의 강한 표현과 규제기관이 입증해야 할 사실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일반 독자와 작가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나
첫째는 절판본 접근성이다. 인기 있는 신간은 여러 서점과 도서관에 사본이 많지만, 작은 출판사가 오래전에 낸 책은 중고 시장에 몇 권만 남을 수 있다. AI 회사가 일반 중고책과 희귀본을 구분하지 않고 대량 매입한다면 연구자와 독자가 찾던 마지막 사본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둘째는 작가와 출판사의 협상력이다. AI 회사가 책을 정식 데이터 사용 계약으로 확보하지 않고 실물 구매 뒤 자체 디지털 사본을 만든다면, 저자와 출판사는 학습 이용 조건이나 대가를 협상하기 어렵다. 법원이 특정 학습 이용을 허용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보상 체계를 어떻게 만들지는 남는 문제다. 애플뮤직의 AI 음악 표시나 음악출판사의 AI 학습 소송처럼, 콘텐츠 산업 전반에서 ‘출력 표시’와 ‘학습 대가’가 별도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셋째는 AI 품질과 다양성이다. 소수 대기업만 오래된 책의 대규모 디지털 사본을 보유하면, 후발 회사는 공개 웹 문서나 값비싼 데이터 계약에 더 의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러 AI 모델이 비슷한 출처를 반복해서 배우거나, 지역 언어·소수 문화·전문 분야 자료가 빠질 가능성이 있다. 경쟁이 줄면 이용자는 가격뿐 아니라 관점과 서비스 선택에서도 손해를 볼 수 있다.
넷째는 도서관과 기록 보존의 역할이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 사회가 원본을 함께 보존하는 장치다. 상업 회사가 만든 디지털 사본은 회사가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정책을 바꾸면 대중이 접근할 수 없다. 실물 원본을 공공기관에 기증하거나 보존용 디지털 사본을 남기는 절차가 없다면, 민간 AI 데이터베이스에만 지식이 남는 역설이 생긴다.
해결책은 모든 스캔을 금지하는 것일까
책의 디지털화 자체는 큰 공익을 만들 수 있다. 검색하기 어려운 자료를 찾게 하고,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꾸며, 훼손되기 쉬운 문서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디지털 사본을 만든 뒤 원본을 없애고 그 사본을 한 회사만 이용하는 구조다.
가능한 대응은 여러 층으로 나눌 수 있다. 희귀본 여부를 먼저 확인해 마지막 사본은 파괴형 스캔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 스캔이 끝난 책을 도서관이나 기록기관에 기증하거나, 재제본이 가능한 자료는 다시 유통할 수 있다. 파괴가 불가피한 경우에는 보존기관이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사본을 남기는 방안도 논의할 수 있다.
경쟁 정책 측면에서는 대형 회사가 어떤 종류의 책을 얼마나 확보하고 폐기했는지 기록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특정 회사의 영업비밀을 모두 공개하지 않더라도, 희귀본 보호 기준과 총량을 감독기관이 확인할 수 있다. 데이터 공유를 강제하는 방안은 저작권과 개인정보, 계약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하므로 단순하지 않다.
출판사와 작가가 허가한 고품질 학습 데이터 시장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AI 회사가 책을 정당한 조건으로 이용하고, 저작권자는 대가와 제외 조건을 선택할 수 있다면 불투명한 대량 구매의 유인이 줄 수 있다. 다만 대형 출판사만 계약 기회를 얻고 작은 출판사와 절판 저자가 빠지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점
가장 중요한 미확인 사항은 규모다. ‘수백만 권’이라는 수치는 앤트로픽 관련 소송에서 제기됐지만, AI 업계 전체가 몇 권을 구매·스캔·폐기했는지는 공개 집계가 없다. 파기된 책 가운데 정말 마지막 사본이 몇 권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공익단체가 FTC에 바로 이 조사를 요청한 이유다.
의도 역시 확인 대상이다. 물류와 스캔 비용 때문에 책을 폐기한 것인지, 경쟁사의 접근을 막으려는 전략이 있었는지는 내부 문서와 구매 패턴을 봐야 한다. 경쟁법 위반은 결과뿐 아니라 시장 지배력, 배제 효과, 사업상 정당한 이유 등을 종합해 판단한다. 책을 버렸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독점 행위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FTC의 다음 행동도 정해지지 않았다. 기관은 서한을 검토한 뒤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업계에 정보 제출을 요구하거나 공식 조사로 전환할 수도 있다. 아마존과 앤트로픽의 상세한 반론도 보도 시점에는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특정 회사를 범법자로 부르는 표현은 피해야 한다.
앞으로 볼 변화
다음 확인 지점은 FTC가 조사 요청에 공식 답변하는지, AI 회사가 책 구매와 폐기 정책을 공개하는지다. 특히 희귀본 확인 절차, 스캔 뒤 보존 방식, 작가·출판사와의 데이터 계약이 공개되면 논쟁을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기 쉬워진다.
독자가 기억할 핵심은 “AI가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대기업이 책의 디지털 내용은 독점적으로 남기고 실물 원본은 없앴다면, 저작권과 별개로 다른 기업과 미래 독자의 접근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문제 제기의 중심이다. 8월 21일 서한은 위법 판정이 아니라 조사 요청이다. 앞으로 FTC가 실제 규모와 경쟁 제한 의도를 확인할 때 비로소 ‘대량 스캔의 효율’과 ‘지식 원본의 보존’ 사이에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답이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