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민원 문턱을 낮추자 공공기관 신청이 급증했다…‘스팸’으로만 보면 놓치는 변화
AI가 복잡한 서류와 항의문을 대신 정리해 주면서 세계 여러 공공기관에 들어오는 신청, 민원, 진정과 청원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연구가 9월 10일 소개됐다. 연구자 크리스 슈미츠는 11개 관할 지역의 84개 사례를 살펴보고 이 현상을 ‘에이전틱 플러딩’, 쉽게 말해 AI가 만든 대량 제출의 물결이라고 불렀다. 영국 주택 옴부즈맨에 접수된 민원은 2022년 약 2,600건에서 지난해 7,000건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늘었고, 미국 소비자금융보호국의 민원은 같은 기간 약 다섯 배 증가했다. 브라질의 사법 청원과 독일의 의회 청원에서도 비슷한 증가가 관찰됐다고 테크크런치는 전했다.
숫자만 보면 “챗GPT가 관공서에 스팸을 쏟아낸다”는 결론으로 가기 쉽다. 그러나 연구가 던지는 질문은 더 어렵다. 늘어난 제출물의 상당수는 존재하지 않는 피해를 꾸며 낸 가짜 민원이 아니라, 원래 지원이나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 있었지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포기하던 사람이 AI의 도움을 받아 낸 신청일 수 있다는 것이다. 행정기관에는 처리량 폭증이지만 시민에게는 오래된 장벽이 낮아진 결과다.
먼저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연구는 AI가 증가를 직접 일으켰다고 확정하지 않는다. 많은 사례에서 신청량이 2022년 이전에는 비교적 평평하다가 생성형 AI가 확산된 뒤 빨라지는 비슷한 흐름을 보였지만, 물가 상승, 제도 변경, 온라인 신청 확대, 사회적 갈등 같은 다른 원인도 영향을 줄 수 있다. 84개 사례의 상관관계는 중요한 신호이지만 단독으로 인과관계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러 나라와 서로 다른 제도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증가세가 아직 둔화하지 않았다는 점은 공공서비스가 준비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를 보여 준다.
AI는 왜 민원과 신청을 갑자기 쉽게 만드는가
공공기관 서류의 어려움은 단순히 글을 못 써서 생기지 않는다. 어느 기관에 내야 하는지 찾고, 자신의 상황이 어떤 규정에 해당하는지 파악하고, 여러 문서에서 날짜와 증거를 모으고, 정해진 형식과 기한에 맞춰 설명해야 한다. 피해를 당했거나 실직·질병·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이 과정은 특히 버겁다. 전문가에게 돈을 내기 어렵거나 행정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권리가 있어도 신청을 포기한다. 정책 분야에서는 이런 시간·인지·감정의 비용을 ‘행정 부담’이라고 부른다.
생성형 AI는 이 부담의 일부를 매우 낮춘다. 기관에서 온 긴 편지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무엇을 요구하는지 쉬운 말로 설명해 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빠진 자료를 목록으로 만들며, 정중한 이의신청 초안을 작성해 달라고 할 수도 있다. 외국어 사용자나 읽기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번역과 요약이 진입 장벽을 낮춘다. 과거에는 여러 웹페이지를 읽고 문장을 다듬어야 했던 일이 이제 한 번의 대화로 시작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AI가 꼭 사람 대신 자동 제출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수요가 폭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서 이해와 초안 작성만 쉬워져도 포기하던 사람의 일부가 신청하게 된다. 앞으로 웹사이트를 직접 다루는 AI 에이전트가 본인 동의 아래 자료를 찾아 입력란을 채우고 제출 전 확인까지 해 주면 문턱은 더 낮아질 수 있다. 기관 입장에서는 자동화된 공격과 시민을 돕는 보조 도구가 같은 형식의 온라인 제출로 들어오므로 둘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나쁜 스팸’과 ‘밀려 있던 권리 행사’는 다르다
기업의 보안 취약점 신고 창구는 이미 AI로 만든 저품질 보고서에 시달린 사례가 있다. 그럴듯한 설명을 대량으로 보내지만 실제 취약점은 없거나 같은 내용을 반복해, 사람이 하나씩 확인하는 비용만 늘어난다. 공공기관도 비슷한 상황을 걱정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만들어 민원을 보내거나, 같은 요청을 여러 표현으로 반복 제출하고, 정치적 목적의 청원을 자동 생성하면 제한된 인력이 소진된다.
하지만 복지 신청, 임금 체불 진정, 주택 분쟁, 소비자 피해, 사법 절차는 버그 신고와 성격이 다르다. 시민이 실제 자격이나 피해를 갖고 있다면 신청이 늘어나는 것은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접근성이 높아진 결과일 수 있다. 슈미츠는 테크크런치 인터뷰에서 조사한 사례의 대다수가 “무언가를 청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청구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평가는 연구자의 해석이며 각 신청의 적법성이 모두 확인됐다는 뜻은 아니지만, 증가량 전체를 스팸으로 취급하면 정당한 권리 행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경고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 항의문을 쓰기 어려워 잘못 부과된 요금을 포기했던 소비자가 AI로 사실관계를 정리해 민원을 낸다면, 기관의 업무량은 늘지만 시장의 잘못을 발견하는 신호도 늘어난다. 주거 지원 자격이 있는 사람이 복잡한 안내문을 이해하지 못해 신청하지 못했다가 AI의 도움으로 지원을 받는다면 정부 예산 지출은 늘 수 있지만 제도가 원래 의도한 대상에게 도달한 것이다. 반면 AI가 허위 영수증이나 거짓 증거를 꾸미고 동일한 서류를 대량 제출한다면 명백한 남용이다. 두 경우를 제출 문체가 매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공공기관에 생기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
첫 번째 문제는 처리 역량이다. 신청이 두 배나 다섯 배로 늘어도 담당 인력과 예산이 같은 속도로 늘기는 어렵다. 정당한 신청까지 오래 기다리게 되고, 긴급한 사건이 일반 문의 속에 묻힐 수 있다. 기관이 AI로 1차 분류를 자동화하려 해도 잘못된 우선순위 때문에 취약한 사람이 뒤로 밀리는 위험이 생긴다.
두 번째는 증거와 문장의 분리다. 생성형 AI는 사용자가 준 사실을 읽기 좋게 정리할 수 있지만, 없는 규정이나 사건번호를 그럴듯하게 넣을 수도 있다. 문장이 전문적이라고 내용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담당자는 표현의 완성도보다 원본 증거, 날짜, 자격 조건과 관할을 확인해야 한다. 시민도 AI 초안을 그대로 제출하기 전에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과 다른 내용이 섞이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세 번째는 공정성이다. 유료 AI와 디지털 기기를 잘 쓰는 사람은 더 설득력 있는 자료를 빠르게 낼 수 있지만, 인터넷 접근이 어렵거나 장애·언어 문제로 도구를 쓰기 힘든 사람은 다시 뒤처질 수 있다. AI가 행정 접근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격차를 만들 수 있는 셈이다. 공공기관이 “AI를 이용하면 되니 상담 창구를 줄여도 된다”고 판단하면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오히려 피해를 본다.
네 번째는 개인정보다. 민원과 복지 신청에는 건강, 소득, 가족관계, 계좌, 주소, 피해 내용처럼 민감한 정보가 들어간다. 이를 아무 챗봇에 통째로 붙여 넣으면 서비스의 저장·학습·관리 정책에 따라 불필요한 노출이 생길 수 있다. 특히 회사 계정이 아닌 개인용 AI에 직장 기밀이나 타인의 개인정보를 입력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기관이 공식 보조 도구를 제공할 때는 어떤 정보가 저장되고 누가 접근하며 언제 삭제되는지 명확히 알려야 한다.
기관이 모든 AI 작성 문서를 막으면 해결될까
AI 사용 여부만으로 접수를 거절하는 방법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효성과 정당성 모두 문제가 있다. AI 작성 탐지기는 확정 판정 도구가 아니다. 문체를 바꾸거나 사람이 일부 수정하면 판별이 어려워지고, 외국어 사용자나 정형화된 행정 문장을 쓰는 사람을 잘못 의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청 내용이 사실이고 자격이 있다면 문장 정리에 AI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제한하기 어렵다.
더 나은 기준은 작성 도구보다 제출의 실체를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내는지, 필수 증거가 있는지, 본인 확인과 동의가 됐는지, 자동 제출이 허용된 범위를 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대량 자동화에는 속도 제한과 중복 제거, 비정상 패턴 탐지가 필요하지만, 장애인 보조기술이나 공식 대리인의 이용을 막지 않는 예외도 있어야 한다.
기관 자체의 절차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민이 AI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안내문과 수십 개의 입력란을 감당해 왔다면, AI 제출 급증은 수요의 문제가 아니라 낡은 서비스 설계가 드러난 결과다. 자주 묻는 질문을 쉬운 말로 바꾸고, 필요한 자료를 처음부터 정확히 알려 주며, 여러 기관에 같은 정보를 반복 제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연결하면 불필요한 왕복이 줄어든다. 사람이 만든 복잡성을 또 다른 AI로만 막는 방식은 비용을 시민과 기관 사이에서 옮길 뿐이다.
한국의 일반 이용자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나
이번 연구는 여러 해외 사례를 다루며 한국 공공기관의 신청량이 같은 비율로 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국민신문고, 지방자치단체 민원, 금융·통신 분쟁, 각종 지원금과 이의신청이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만큼 비슷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AI로 초안을 만드는 것 자체보다 사실 검증과 개인정보 보호가 중요하다.
기관에서 받은 안내문을 AI에 넣기 전에는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상세 주소, 건강정보와 제3자의 개인정보를 지우는 편이 안전하다. “이 문서가 무슨 뜻인지”, “내가 준비해야 할 자료를 목록으로 만들어 달라”, “내가 제공한 사실만 사용해 초안을 작성하라”고 범위를 좁히면 도움이 된다. 법적 기한, 신청 자격, 제출 기관은 AI 답변이 아니라 해당 기관의 공식 페이지나 담당자에게 다시 확인해야 한다. AI가 인용한 법 조항과 연락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AI가 대리인이 아니라 초안 도구라는 점이다. 최종 제출자는 문서의 사실관계와 표현에 책임을 진다. 과장된 피해액, 존재하지 않는 증거, 공격적인 표현이 섞이면 오히려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경험을 날짜순으로 정리하고 필요한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 데 활용하면 행정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기업과 공공기관이 준비할 변화
고객센터와 민원 부서는 단순히 “AI 문서가 늘었다”는 지표만 볼 것이 아니라 유효 신청률, 중복률, 허위 정보 비율, 처리시간, 취약계층의 접근성 변화를 따로 측정해야 한다. 전체 건수가 늘었어도 실제 자격자의 신청이 늘고 잘못된 제출이 줄었다면 서비스 접근성은 좋아진 것이다. 반대로 매끄러운 문장만 늘고 증거 없는 반복 요청이 급증했다면 접수 단계의 안내와 확인 장치를 손봐야 한다.
답변 자동화에도 같은 기준이 필요하다. 기관이 시민의 AI 민원을 또 다른 AI로 일괄 거절하거나 모호한 답변을 보내면 대화가 끝없이 증식할 수 있다. 어떤 사안은 자동 안내로 해결하고, 어떤 사안은 사람에게 즉시 넘길지 공개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거절 사유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시민이 부족한 자료를 보완할 방법을 알려 줘야 불필요한 재신청을 줄일 수 있다.
정책 측면에서는 승인된 디지털 대리인의 범위도 논의해야 한다. AI가 사용자의 동의 아래 서류를 작성하는 단계와, 웹사이트에 로그인해 자동 제출하고 기관의 답변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는 단계는 위험이 다르다. 본인 확인, 위임 기록, 제출 전 승인, 자동화 사실의 표시, 반복 제출 제한을 단계별로 설계해야 한다. 단, 표시 의무가 정당한 신청을 차별하는 낙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점
가장 큰 미확인점은 인과관계다. 생성형 AI 이용률과 신청 증가가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증가를 AI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각 관할 지역의 제도 변경과 경제 상황을 통제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신청자가 실제로 어떤 AI를 어느 단계에서 사용했는지 직접 조사한 자료도 더 있어야 한다.
또한 ‘대다수가 정당한 신청’이라는 평가가 84개 사례 전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검증됐는지, 분야별 허위·중복 비율이 어떤지 공개 논문과 데이터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테크크런치가 소개한 연구는 다음 달 AI 윤리와 사회 관련 학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라고 보도됐다. 동료평가와 전체 방법론이 공개되면 사례 선정, 기간, 비교 기준을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달라지는 점
AI는 공공서비스 수요를 새로 만들어 내는 동시에, 과거에 보이지 않던 수요를 드러낸다. 기관에는 더 많은 업무가 생기지만 시민에게는 권리를 행사할 새로운 통로가 열린다. 그래서 앞으로 볼 숫자는 단순한 민원 총량이 아니다. 유효한 신청이 얼마나 늘었는지, 처리 지연이 누구에게 집중되는지, AI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같은 권리를 누리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변화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모든 AI 문서를 스팸으로 막는 것도, AI가 알아서 행정을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정당한 요청은 더 쉽게 통과시키고 반복·허위 제출은 더 정확히 가려내며, 애초에 AI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절차를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구의 후속 논문이 공개되면 84개 사례의 인과관계와 분야별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다음 관전 지점이다.